- 챗GPT(ChatGPT)를 시작으로 미드저니(Midjourney), 소라(Sora)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AI)은 이제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AI의 성능은 ‘얼마나 더 똑똑하고 빠른 두뇌(GPU)를 가졌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AI 기술의 패러다임이 조용히, 그러나 아주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더라도 온몸의 신경계가 그 속도를 따라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 오늘은 AI 산업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전쟁, 바로 AI의 ‘신경망’이라 불리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에 따라 미래 AI의 모습이 결정될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목차와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보세요.
1. GPU 유휴 시간: 세상에서 가장 비싼 ‘멍 때리기’
- 우리가 사용하는 AI 서비스의 심장은 ‘데이터센터’에 있습니다. 이곳에는 개당 가격이 중형차 한 대 값과 맞먹는, 약 4만 달러(한화 약 5,500만 원)에 달하는 엔비디아의 H100 같은 최첨단 GPU(그래픽 처리 장치)가 수만 개씩 모여 거대한 클러스터를 이룹니다. 이 GPU들은 AI의 두뇌 세포와 같아서, 서로 긴밀하게 소통하며 힘을 합쳐야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AI가 더 똑똑해질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GPU의 계산 능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이 GPU들을 연결하는 ‘길’, 즉 네트워크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페라리 수만 대를 좁은 시골길에 몰아넣은 것과 같습니다. 차(GPU)는 빛의 속도로 달릴 준비가 되어 있지만, 길이 좁고 막히니(네트워크 병목 현상) 결국 제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 이 때문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구축한 GPU들이 정작 계산은 하지 못하고, 다른 GPU로부터 데이터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멍 때리는’ 시간이 발생합니다. 업계에서는 이를 ‘GPU 유휴 시간(idle time)’이라고 부릅니다. 만약 1만 개의 H100 GPU로 구성된 데이터센터에서 유휴 시간이 단 10%만 발생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는 1,000개의 GPU, 즉 550억 원에 달하는 자산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기만 소비하며 멈춰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단위로 환산하면 수십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멍 때리기’인 셈입니다. AI 모델 학습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Visual Capitalist의 분석 기사를 참고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2. 거대 AI 모델의 물리적 한계: 왜 네트워크가 발목을 잡는가?
- 지난 10년간 AI 기술의 발전은 ‘무어의 법칙’을 뛰어넘는 반도체, 즉 GPU의 성능 향상이 이끌어왔습니다. 하지만 GPT-4와 같은 거대 언어 모델(LLM)의 규모가 수억 개에서 이제는 수조 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로 커지면서, 새로운 차원의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 거대 AI 모델은 마치 수조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직소 퍼즐과 같습니다. 이 퍼즐은 너무나도 커서 하나의 테이블(단일 GPU)에는 다 올려놓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수만 개의 테이블(GPU 클러스터)에 퍼즐 조각들을 나누어 놓고, 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퍼즐을 맞춰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 데이터 병렬 처리 (Data Parallelism): 100명의 요리사(GPU)에게 모두 똑같은 레시피 북(AI 모델)을 나눠줍니다. 그리고 각자 다른 재료(데이터)를 주며 요리를 만들라고 한 뒤, 나중에 그 결과물을 합치는 방식입니다. 각자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어 효율적이지만, 100명 모두에게 거대한 레시피 북 전체를 복사해줘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 모델 병렬 처리 (Model Parallelism): 하나의 너무나도 복잡하고 거대한 레시피를 100개의 페이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1번 요리사에게는 1페이지를, 2번 요리사에게는 2페이지를 주는 식입니다. 요리를 완성하려면 1번 요리사는 2번 요리사와, 2번은 3번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다음 단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식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통, 즉 네트워크 트래픽을 유발합니다.
- 현대의 거대 AI 모델 학습은 이 두 가지 방식을 복잡하게 섞은 하이브리드 형태를 사용합니다. 이 과정에서 특정 GPU 그룹들이 다른 모든 그룹들과 거의 동시에 데이터를 주고받아야 하는 **’All-to-All’ 통신**이 필수적으로 발생합니다. 이는 마치 수만 명이 참여하는 화상 회의에서,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단 한 명의 인터넷 연결이라도 느려지면, 나머지 9,999명이 모두 그 한 명을 기다려야 하는 최악의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이죠. 이처럼 복잡한 분산 학습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Hugging Face의 기술 문서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입니다.
3. 승자독식 vs 개방형 동맹: 인피니밴드와 울트라 이더넷
- 이러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시장을 장악한 기업은 단연 GPU의 제왕, 엔비디아입니다. 엔비디아는 자사의 GPU와 함께 사용했을 때 최고의 성능을 내는 폐쇄적인 초고속 네트워크 기술 ‘인피니밴드(InfiniBand)’와 ‘NVLink’를 함께 제공합니다. 이는 마치 최고의 엔진을 만들고, 그 엔진 오일과 타이어까지 자사 제품만 써야 최고의 성능이 나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전략은 고객들을 엔비디아의 기술 생태계 안에 묶어두는 강력한 ‘잠금 효과(Lock-in)’를 만들어냈고, 엔비디아는 GPU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장비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엔비디아의 독주를 위협하는 거대한 연합군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AMD, 인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IT 업계의 공룡들이 뭉쳐 만든 ‘울트라 이더넷 컨소시엄(UEC)’입니다. 이들의 무기는 ‘이더넷(Ethernet)’입니다. 이더넷은 우리가 가정과 사무실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터넷 랜선에 쓰이는 ‘개방형 표준’ 기술입니다. 특정 회사에 종속되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개발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막강한 장점이 있습니다.
- UEC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이더넷 기술을 AI 시대에 맞게 혁신하여, 인피니밴드의 성능은 따라잡거나 뛰어넘으면서도 훨씬 저렴하고 유연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특정 자동차 회사가 독점하는 비싼 전용도로(인피니밴드)에 맞서, 모든 자동차가 더 빠르고 값싸게 달릴 수 있는 개방형 공공 고속도로(울트라 이더넷)를 건설하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이 경쟁의 결과에 따라 미래 AI 데이터센터의 표준이 결정될 것입니다. UEC의 비전과 기술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UEC 창립 멤버인 Arista의 기술 블로그에서 직접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4. 네트워크 전쟁의 핵심 기술: RDMA와 RoCE 쉽게 이해하기
- 그렇다면 이 두 진영의 기술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RDMA(Remote Direct Memory Access)’라는 기술에 있습니다.
- 컴퓨터가 데이터를 주고받는 과정을 공항의 수하물 처리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네트워크 통신(TCP/IP)은, 우리가 부친 짐(데이터)이 공항의 중앙 처리 시스템(CPU와 운영체제)을 거쳐 여러 단계의 검사와 분류를 통과한 뒤 비행기에 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은 안전하지만 여러 단계를 거치므로 시간이 걸립니다.
- 반면 RDMA는 ‘VIP 전용 통로’와 같습니다. 이 통로를 이용하면 우리의 짐(데이터)이 복잡한 중앙 처리 시스템을 일일이 거치지 않고, 출발지 컴퓨터의 메모리에서 목적지 컴퓨터의 메모리로 직접 고속 전송됩니다. CPU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지연 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데이터 전송 속도가 매우 빨라집니다. 엔비디아의 인피니밴드는 태생부터 이 RDMA 기술에 최적화되어 있어 AI 학습 환경에서 막강한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 이에 맞서는 이더넷 진영의 무기는 ‘RoCE(RDMA over Converged Ethernet)’입니다. 이름 그대로, 일반 이더넷 고속도로에서 RDMA라는 VIP 차량이 달릴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기술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큰 난관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이더넷은 가끔 교통 체증으로 인해 데이터 패킷을 일부러 버리는(packet drop) 경우가 있는데, 이는 AI 학습처럼 단 하나의 데이터 손실도 치명적인 작업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울트라 이더넷 컨소시엄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 손실 없는 ‘무손실(Lossless)’ 환경을 구현하고 혼잡을 제어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이더넷에 추가하여 인피니밴드에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더 빠른 네트워크가 열어줄 우리의 미래
- 이 복잡한 기술 전쟁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사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바꿀 만큼 중요합니다. AI 데이터센터의 네트워크 병목 현상이 해결되면, AI의 학습과 추론 속도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AI 서비스의 혁신으로 이어집니다.
- 네트워크의 발전이 열어줄 미래는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현실로 만듭니다.
- 진정으로 대화하는 AI: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대화의 맥락을 기억하고 감정의 뉘앙스까지 파악하며 농담까지 주고받는 AI 친구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외로운 노인분들의 말벗이 되어드리거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는 AI 선생님이 등장할 것입니다.
- 생명 과학의 혁명: 수십 년이 걸리던 신약 개발이나 단백질 구조 분석을 AI가 단 몇 시간 만에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암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난치병 정복의 시간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 완전 자율주행 시대의 개막: 자동차의 수많은 센서가 수집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0.001초의 지연도 없이 처리하여,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안전한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해집니다. 출퇴근길의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도심의 교통 체증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 초개인화된 창작의 시대: “슬픈 날 듣기 좋은, 비 오는 파리 거리 느낌의 재즈 음악을 만들어줘”라고 말하면, AI가 즉석에서 나만을 위한 음악을 작곡해 줍니다. 나의 아이디어를 순식간에 소설, 그림, 영상으로 만들어주는 시대가 열려 누구나 1인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6. 결론: AI 시대의 투자자,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 AI 기술 경쟁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단순히 개별 두뇌(GPU)의 성능을 넘어, 이 두뇌들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연결하여 ‘거대한 집단 지성’을 만드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 따라서 현명한 투자자라면 이제 GPU 제조업체인 엔비디아뿐만 아니라, 이들을 연결하는 ‘신경망’을 만드는 기업들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 네트워크 칩 제조사: 브로드컴(Broadcom), 마블 테크놀로지(Marvell Technology) 등 고성능 이더넷 스위치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 울트라 이더넷 연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네트워크 장비 업체: 아리스타 네트웍스(Arista Networks), 시스코(Cisco) 등은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실제 네트워크 스위치와 라우터를 공급하는 전통의 강자들입니다.
- GPU 경쟁사: AMD와 인텔 역시 자체 GPU와 함께 개방형 네트워크 생태계를 통해 엔비디아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술 발전 또한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치열한 경쟁의 끝에서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을 현실로 만들어 줄 더욱 강력하고 지혜로운 AI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AI의 두뇌를 깨우는 심장,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의 최종 승자는 결국 이 기술의 혜택을 누리게 될 우리 모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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